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나카 기이치 (문단 편집) === 총리 시절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westatic.com/souri26.jpg]]}}} || || 26대 총리 취임 후 || [[1927년]] 쇼와금융공황으로 인해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다나카 기이치의 정우회에게 내각조성의 대명이 내려졌고, 정우회 총재로서 제26대 일본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내각은 전 총리나 차기의 수상자리를 노리는 인사 혹은 장래에 총리가 유력시되는 거물들로 가득찬 내각이라는 평을 들었다. 내치에선 금융공황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가라앉히고, [[보통선거법]]을 실시했으나 안보법 등의 악법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기타 반정부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했다. 외교에서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하여 자신이 스스로도 외무대신을 겸직하고 정무차관으로 대중국 강경 침략론자인 모리 가쿠를 앉혔다. 처음엔 둘은 잘 맞은 편이었지만, 그러나 모리의 지나친 강경론에 어느 정도는 조정의 필요성도 있다고 느끼는 다나카의 성향은 점차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리는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는데, 모리 가쿠의 주도하에서 "동방 회의"가 개최되어 외무부, 육해군 등의 중국 관련 인사들을 소집하여 중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정할 정도였다. 1927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하야한 [[장제스]]가 일본을 방문하자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사저에서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했으나 과거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당과 합작하여 중국의 통일을 도와달라는 장제스의 요청에는 남방의 안정에 진력하라고 답변하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장제스는 다나카가 자신을 일개 군벌 중 하나로 대한다고 크게 불쾌해했다. 이후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일본의 조계지가 있는 산동성에 국민혁명군이 진주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2차 산동파병]]을 거행하여 제남의 [[장제스]]의 1집단군을 공격, [[제남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8년]]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자 초기에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육군내부의 반발에 밀려 포기하였다. 그러나 야당인 [[민정당]]이 이를 계속 공격하고 [[쇼와 덴노]]까지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는 발언을 하자 결국 [[1929년]] 7월 내각총사퇴를 하면서 수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